사회

[특집] 12.12 쿠데타 그 후 41년 (제1부)

DVS_2020 2020. 12. 12. 08:41

41년 전인 197912 12, 대한민국은 19615161차 군사쿠데타를 경험한 지 18년 만에 2차 군사쿠데타를 경험하고 말았다.

이로써 이 땅의 민주주의가 다시 짓밟히는 일이 41년 전 이날 일어나고 말았다.

<1> 41년 전 오늘, 서울에선 무슨 일이?!

19791026, 18년 동안 독재했던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오랜 유신 독재가 막을 내렸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를 틈타 19791212, 전두환과 노태우는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허삼수 등 자신들과 한패거리인 동조세력을 한데 모아 경복궁 내의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게 한 뒤 서울 시내 일원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지시하고 논의하는 등 수도 서울을 신군부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다.

이들 두환 일당 중 허삼수, 우경운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전 대통령 암살사건에 관련 있다고 보고,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강행했다. 이날 저녁 7,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고 연행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50명을 투입하였는데 – 721분 이들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930분쯤 유학성, 전두환, 황영시 등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에게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연행 및 조사를 재가하라고 요구했으나 사후결재여서 거절당했고, 결재와 관련된 의견들로 밤을 새우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를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해 오던 3군사령관의 이건영 중장과 수도경비사령관의 장태완 소장 등에 대해 하극상을 감행하며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했다. 그날 서울은 말 그대로 군부세력의 권력쟁탈전으로 얼룩졌다.

<2> 군사 반란의 주역, 하나회는 누구인가?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주역 하나회(혹은 보통 신군부로 불린다)12.12 쿠데타가 발발하기 16년 전인 1963(그 해는 1961년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사독재정부의 취임이 있었다)에 육군사관학교 11기생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등이 주도해 결성된 비밀 군사조직이다. 이들은 주로 영남 출신의 소장파 장교들을 대상으로 3~4명씩 회원을 계속 모집하여 몸집을 불렸으며, 19791212일 쿠데타를 주동했다. 이후 하나회(=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짓밟고, 광주민주항쟁을 잔혹하게 탄압하여 대한민국을 공포의 피바다로 만들었다.

 

<3> 잔인한 서울의 봄

19791026일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유신독재 체제가 막을 내리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취임한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그 해 126일 박정희 집권기에 내려졌던 긴급 조치를 해제하여 개헌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긴급조치에 의해 부당하게 탄압받던 재야인사들도 사면 및 복권되었다.

198051일부터 서울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고 신군부 세력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 항쟁이 전개되었다.

그 때! 12.12 쿠데타로 대한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특히 전두환과 노태우는 권력장악을 위해 비상 계엄령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등의 시국 수습 방안을 앞세우며 대한민국 국민들을 기만하려 했다.

517일 신군부(하나회) 독재세력은 곳곳에 무차별적으로 비상 계엄령을 확대하여 공포통치를 부추겼다. 그리고 서울의 봄은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독재세력의 폭압 앞에서 막을 내렸다.

 

[동균신문 기획보도국]